생두를 고르고 프로세싱 종류와 로스터 구조를 이해하고 열 반응까지 꿰뚫었는데…이 모든 과정을 거쳐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단 하나다. '맛'. 그리고 그 맛의 깊은 뿌리인 향(아로마). 커피를 좋아한다는 건 어떤 플레이버를 좋아하는가에 대한 취향을 드러내는 일지도 모른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맛의 실체 즉, 플레이버와 아로마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본다.
플레이버란 무엇인가?
'이 커피 무슨 맛이 나나요?'라는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맛은 미각을 통한 감각만 포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레이버 = 맛 + 향 + 입안 느낌 + 그 외 모든 감각
맛은 신맛? 단맛? 을 논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렌지를 떠올려보자. 시장에서 파는 같은 오렌지라도 어떤 건 시고 어떤 건 달고 어떤 건 껍질에서부터 향긋하다. 입에 머금었을 때 혀끝과 뺨 안쪽 그리고 코로 올라오는 느낌까지 모두 다르다.
☞ 이러한 총체적 경험이 바로 플레이버다. 한마디로 커피 맛은 커피가 나한테 어떤 인상을 주느냐의 문제다.
좋은 플레이버란?
그냥 향기로운 커피? 이걸로는 부족하다. 좋은 플레이버는 세 가지 기준으로 평가된다.
첫 번째, 연관성과 개연성
라즈베리 향 난다고 했는데 바디가 무거우면 이상하잖아? 맛과 향이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서로 잘 어울려야 한다.
두 번째, 밸런스
한쪽만 튀면 몰입감이 떨어진다. 신맛과 단맛 그리고 바디감이 균형감 있어야 한다.
세 번째, 복합성
첫 모금, 중간, 여운(after) 이 모두가 다르면서도 연결돼야 한다. 향미가 다층적(레이어드)으로 느껴지고 마실수록 다른 느낌이 살아나야 한다.
☞ 결국 플레이버는 기억이다. 맛있는 커피를 계속 마셔본 사람이 맛있는 커피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다.
아로마는 어디서 오는가?
커피를 마실 때 가장 먼저 커피를 인식하는 것은 '코'일 거다. 즉, 향을 가장 먼저 인식한다. 커피에서 맡을 수 있는 모든 향. 이걸 '아로마'라고 부른다. 아로마는 코로 즐기는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아로마는 총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엔자이매틱 (Enzymatic)
커피 생두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향이다. 로스팅 전에도 존재하지만 로스팅을 하면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품종이나 가공(프로세싱) 방법에 따라 다른 엔자이틱 아로마를 지니게 된다. 대표적인 향은 꽃이나 과일향 등의 밝고 산뜻한 향이다. 라이트 로스팅이나 스페셜티 커피에서 느낄 수 있다.
⊙ 생두 고유의 향
⊙ 꽃향, 과일향
⊙ 품종이나 프로세싱 방법에 따라 결정됨
→ 커피가 원래 갖고 있는 향기
② 슈가 브라우닝 (Sugar Browning)
커피가 로스팅되면서 생기는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다. 마이야르와 캐러멜화로 생성된다. 당분과 아미노산이 열을 받을 때 일어나는 화학반응이다. 견과류, 곡물, 캐러멜 같은 향이 주를 이룬다. 미디엄 로스팅(중배전)에서 잘 느낄 수 있다.
⊙ 마이야르 반응으로 생김
⊙ 견과류, 곡물, 캐러멜 계열
→ 로스팅 중에 만들어지는 고소한 향기
③ 드라이 디스틸레이션 (Dry Distillation)
고온에서 일어나는 열분해 반응을 통해 만들어진 향이다. 다크 로스팅에서 주로 발생한다. 연소에 가까운 '건식 증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모키, 타르, 다크 초콜릿, 숯과 같은 향을 느낄 수 있다. 묵직하고 진한 인상을 준다.
⊙ 고온에서 열분해로 생김
⊙ 스모키, 초콜릿, 로스트 향
→ 다크 로스팅의 결과물
이 세 가지는 로스팅 단계별로 차례차례 등장한다. 초반엔 꽃이나 과일 같은 아로마가 주를 이루고 1차 크랙쯤 되면 고소한 향이 올라온다. 이후엔 스모키 하거나 다크 한 느낌이 터진다.
로스팅과 아로마의 상관관계
이제 로스터의 손끝이 어떤 향을 만드는지를 보자.
열이 닿는 위치에 따라 다른 향이 생긴다
⊙ 외부 = 슈가 브라우닝: 로스팅할 때 생두 외부부터 열을 받죠. 이 겉면에서 마이아르 반응이 일어나고 캐러멜화도 진행된다.
⊙ 내부 = 엔자이매틱: 생두 내부는 겉보다 열이 늦게 도달한다. 그런데 생두 내부에는 생두 본연의 향이 숨어있죠. 꽃이나 과일향이 로스팅을 통해 서서히 올라오게 되는 거다. 단, 이 향들은 손상되기 쉬운 민감한 향. 너무 강하거나 빠르게 열이 가해지면 손상된다.
⊙ 과열되면 = 디스틸레이션 폭주: 열이 너무 세거나 오래 가해지면 원두 내부와 외부가 모두 과열된다. 향 성분들은 깨지고 타는 향이 지배하게 된다. 디스틸레이션이 강화되는 과정이다. 과한 디스틸레이션은 고급향을 지워버린다. 결국 무겁고 단조로운 탄 향만 남게 되는 거다.
☞ 커피가 익는 속도에 따라 향이 도망가기도 하고 더 깊이 베어들 기도 한다.
아로마 방출 순서는 분자량 순
⊙ 가벼운 향부터 날아가고 무거운 향은 늦게 등장한다
→ 그래서 로스팅 타이밍이 아주 중요하다
1차 크랙 직후 견과향이 피어오른다. 여기서 멈추면 고소하고 산뜻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이때, 로스팅을 더 하면? 스모키 함이 강해지고 쓴맛도 동반된다. 이렇게 커피의 인상은 확 달라진다.
산지별 플레이버 특징
로스팅을 어떻게 하든 기본 스펙은 무시 못한다. 커피가 자란 땅과 품종은 플레이버의 뼈대를 이룬다.
산지 | 특징 |
에티오피아 | 꽃, 과일, 산미 중심. 바디는 부드럽고 단맛은 적은 편 |
브라질 | 너트, 초콜릿, 단맛 강조. 무겁고 묵직한 바디감 |
콜롬비아 | 산미 -단맛 밸런스. 균형잡힌 플레이버 |
파나마 게이샤 | 엔자이매틱 끝판왕. 재스민, 베르가못, 감귤 등 미친 향기 |
☞ 이런 특성은 로스팅 방향에 영향을 준다. 꽃향 중심이면 라이트 로스트가 초콜릿 계열이면 미디엄 다크 정답에 가깝다.
로스터가 기억해야 할 것
로스터의 역할은 볶는 포인트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 내용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역할이다.
⊙ 아로마는 언제 등장하는가?
⊙ 그걸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게이샤처럼 향이 가벼운 커피는 강하게 볶으면 그 향이 다 날아간다. 브라질처럼 무거운 원두는 약하게 볶으면 밋밋하다.
☞ 로스터는 이 향들을 조율하는 사람.
지금까지 커피 플레이버와 아로마에 대해 알아봤다. 로스팅으로 로스터가 표현하고 싶은 건 단 하나다. 커피 한 잔의 인상. 그게 꽃향이든 캐러멜이든 스모키든... 플레이버는 그 커피가 어떤 커피인지를 알려주는 강력한 언어다. 로스팅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플레이버와 아로마를 계산하고 설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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